소설 재연재 | 사랑은 냉면처럼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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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애는 종일 나만 따라다녔다. 화장실과 탈의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늘 옆에 붙어 다녔다. 입을 잠시라도 다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특이 체질인지 쉬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아무리 질문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수애는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질문을 해댔다. 수애가 귀찮다는 감정이 밉다는 감정을 앞지르려는 오후 시간이 되면 1층으로 도망가 버렸다. 아직은 날씨가 덥지 않아서 냉면부가 바쁘지 않기 때문에 오전이면 내 일을 끝낼 수 있었다.

무엇을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고 냉면기술도 하나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수애는 불평하지 않았다. 내게 잘 보이려는 건지 정말 미안해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수애는 변했다. 한결같이 수애를 미워하는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서로 미워해야 미워할 맛이 나는데 혼자 미워하려니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점심을 먹은 후에는 퇴근 때까지 늘 수지가 있는 1층에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면 무철이를 2층으로 올려 보냈다. 혹시나 수애가 다칠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아무리 원수같이 미운 수애지만 또 다치면 내가 해고될 판이니 어쩔 수 없었다. 무철이는 내가 1층으로 내려가면 입을 귀에 걸고 2층으로 올라갔다. 멍청한 녀석, 얼굴만 예쁜 여자가 뭐가 좋아서 저러는 건지.

나는 내 이상형 수지가 있는 1층에서 일하면 즐거웠다. 수지와는 말이 잘 통했다. 어떻게 자매가 이리도 성격이 반대인지 신기할 정도였다. 수지는 수애와는 다르게 목소리도 작고 부드러웠다. 수지 자리는 식당 입구에 있는 카운터 옆이었지만 한가할 때면 입구와 반대방향인 주방 앞으로 와서 나와 얘기를 했다. 난 수지와의 대화가 즐거워서 물어보지도 않은 지난 얘기들을 해줬다. 진상 손님과 있었던 일, 팁을 받았던 일 등을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곤 했다.

수지와는 빠르게 친해져서 이제 틈만 나면 수다를 떨기에 이르렀다. 더 친해지면서 이제 주방 앞이 아니라 주방 안으로 들어와서 얘기하며 놀았다. 내가 칼질을 하면 수지는 넋을 놓고 구경했고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수지는 신비한 동화의 나라에 온 어린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역시 소문대로 최고의 솜씨라고 칭찬을 해줬다.

**

낮 2시쯤부터 저녁 5시경까지는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이다. 이 시간엔 자리를 비워도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최소한의 인원 한 명만 자리를 지키면 되는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늘 그렇듯이 수지가 주방으로 놀러올 거라 생각하고 1층으로 내려갔다. 무철이를 2층으로 올려 보내고 쉬고 있는데 수지가 아니라 지은이가 들어왔다. 지은이는 할 말이 있으면 늘 인터폰을 사용했기에 의외였다.

“놀래긴. 수지가 아니라서 섭섭하냐?”

“섭섭하긴. 절대 아냐.”

“거짓말하지 마.”

“들켰냐?”

지은이가 주방에 들어온 건 오랜만이었다.

“넌 무슨 친구가 나에게는 관심도 없냐?”

“관심? 그래 관심. 참, 선 본 남자는?”

“빨리도 물어본다. 벌써 한 달도 더 지났거든!”

아차 싶었다. 내가 수지에게 푹 빠져서 지은이를 잊고 있었다.

“미안, 내가 요즘 정신이 없었잖아.”

“그래. 수지에게 홀려서 정신이 없긴 하지.”

내가 수지를 좋아한다는 게 겉으로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 보여?”

“이 멍충아, 그래 보이는 게 아니라 가게 사람들 다 알아. 네가 좀 티를 냈어야지. 수지도 그래, 걘 틈만 나면 주방에 들어와서 놀고 그러냐? 그럴 거면 주방으로 아예 들어가지 왜 홀에서 일한대?”

“다 알아? 에이, 설마.”

“다 알아.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라. 내 말이 거짓말인가.”
정말일까? 설마 하고 막내를 불렀다. 열심히 자기 일을 하던 막내는 내가 부르자 바로 달려왔다.

“네, 형님.”

“야, 너 솔직히 말해야 해.”

“네. 저야 늘 솔직해서 탈이죠.”

멍청한 녀석, 자기가 너무 솔직해서 탈이라는 건 아네. 내가 수애와 사이가 나쁘다는 걸 고자질한 놈은 분명 막내일 것이다.

“나에 대한 소문 혹시 들은 거 있냐?”

“소문이요? 소문 같은 건 없는데요.”

막내는 잠시 고민하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아, 있어요. 부주가 먼저 사과했다면서요?”

“이런 멍청한 놈아, 그런 거 말고.”

큰일이다. 남자 놈이 여자가 하는 사과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이미 가게에 소문이 나버렸나 보다. 그렇다면 수지도 알고 있을 텐데. 속 좁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고민이 되었다.

“아, 있어요, 있어. 형님이 예 과장님 좋아한다면서요?”

막내의 말대로라면 지은이의 말이 사실이었다. 정말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내가 수지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아? 너 그거 누구에게 들었어?”

“에이, 들어야 아나요? 다 보이는데.”

“야, 됐어. 가서 일이나 해. 너는 일은 안 하고 내 행동이나 보고 다니냐?”

“괜히 시비야.”

막내는 혼자 중얼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건 그렇고 선 본 건 어떻게 된 거야?”

“말 돌리지 말고,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수지는 수애 언니란 걸 잊지 마라.”

그렇지, 수지는 수애 언니였다. 자매가 같은 직장에서 일한다는 것도 흔치 않은 일인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서로 자매라는 것도 흔치 않을 일이다. 나는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알았어. 명심할게.”

지은이는 그때서야 안심을 했는지 얼굴색이 좋아졌다.

“선 본 남자 요즘도 계속 만나. 서로 알아가는 중.”

“마음에 들면 꽉 잡아.”

노처녀 소리 듣기 싫으면 좋은 사람 나타났을 때 결혼해야지. 이건 진심이다. 지은이를 알게 된 지도 오래됐는데 그동안 연애하는 걸 보질 못했다.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너는, 참 눈치가 없어.”

“내가?”

“아니다. 내가 누굴 탓하냐. 다 내 잘못인데.”

“너 요즘 자꾸 아리송한 말을 하는데, 쉽게 말해줘라. 알아들을 수가 없네.”

“됐거든. 너는 참 좋겠다. 머리가 나빠서.”

“뭐라 그러는 거야?”

“난 일하러 간다. 수지 보낼게.”

지은이는 말을 하고는 주방을 나가버렸다.

내가 지은이에 대해서 잊은 게 있나보다. 힘든 막내시절 날이면 날마다 일이 끝나면 지은이와 술을 마시며 윗사람 뒷담화를 했었다. 그렇게 친해진 지은이는 나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친구다. 나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나도 지은이에 대해서는 많이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의 지은이를 보면 내과 진짜 친구인지 부끄럽다.

‘오랜만에 일 끝나고 한잔하자. 콜?’

지은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됐거든.’

나에게 삐진 게 있나?

수지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안녕!”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수지를 보자 머릿속이 비워지듯 멍해졌다. 천사를 본 적은 없지만 만약 천사를 만난다면 수지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웃는 모습일 것이다.

“어서 와.”

**

퇴근 때가 되자 문자가 왔다. 당연히 지은이일 거라 생각했는데 수애였다.

‘한잔합시다.’

‘싫어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술 안 마시는 사람이 한잔하자는 것도 이상했고, 더군다나 난 수애와 얼굴을 마주 보기 싫었다. 이러다가 내 별명이 ‘싫어요’가 되는 건 아닌지….

‘단둘이 말고, 무철이랑 막내도 같이.’

진작 이렇게 문자를 보낼 것이지. 암튼 공부 많이 했다고 똑똑한 건 아닌가보다.

‘싫어요.’

바로 답장을 보냈다.

주방을 나가려는데 지은이가 퇴근준비를 하고 주방 앞을 지나가며 나를 불렀다.

“경주야, 요 밑에 호프로 와라. 다 모인다네.”

“그래.”

잡혔다. 수애가 분명 지은이에게 나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을 것이다. 요망한 것. 수지에게 같이 가자고 문자를 보냈지만 수지는 집에 가는 중이라며 다음을 약속했다.

옷을 천천히 갈아입고 휴게실에서 TV를 봤다. 그렇게 시간을 30분쯤 끌다가 모두 모여 있다는 술집으로 갔다. 수애, 무철, 막내 그리고 지은이가 있었다. 난 수애와 가장 먼 곳에 앉았다.

“진짜 왔네? 언니, 고마워요.”

수애가 날 보자마자 반가워하며 말했다. 한참 분위기가 올라 있었나 보다. 넷은 신나게 웃고 있었다.

“이정도 쯤이야. 부탁 있으면 언제든 말만 해. 내가 경주는 꽉 잡고 있거든.”

“진작 언니 도움 받을 걸.”

“막내야, 술 좀 따라봐라.”

완전 속은 느낌이다. 난 죄 없는 막내에게 투덜거렸다.

술자리가 늘 그렇듯 별 영양가 없는 얘기가 이어졌다. 수애는 사이다만 연거푸 마시면서 지은이와 수다를 떨었다. 무철이는 옆에서 맞장구를 치고 막내는 실없이 웃기만 했다. 나는 왜 부른 걸까? 가만히 맥주만 마시다가 화장실에 갔다 오니 수애 혼자 앉아 있었다.

“이리 내 앞으로 와요.”

“거긴 지은이 자린데.”

“언니 먼저 집에 갔어요. 무철이도, 막내도 집에 갔어요.”

“뭐야, 사람 불러놓고 먼저 가버린 거야? 나도 이만 갈게요.”

“나 혼자 있으라고요?”

“미쳤어요? 술도 안 마실 거면서 혼자 술집에서 뭐하게요? 당신도 이만 들어가세요.”

“잠깐만 앉아 봐요. 할 말이 있어요.”

할 말이 있거나 말거나 내가 알게 뭐람.

술집을 나와 버렸다. 수애가 큰 목소리로 불렀지만 무시했다. 부르거나 말거나.

“이봐요, 무슨 사람이 이래요? 사람이 부르는데 뒤도 안 돌아보고 가요?”

수애가 급히 뛰어나와 내 옆으로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차 안 끊겨요? 집에나 가세요.”

“택시 타고 가지 뭐.”

“돈 많네. 난 가난해서 차 끊기기 전에 갈랍니다.”

“경주 씨, 우리 노래방 가요.”

“싫어요.”

“에이, 내가 쏠게요. 같이 가요.”

난 걸음을 멈추고 수애를 빤히 쳐다봤다. 수애는 자신을 미워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지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나 노래 부르고 싶다. 여자 혼자 노래방 가면 처량해 보이잖아요. 같이 가요. 네?”
이 여자가 사이다를 많이 마셨다고 취했나? 이 이상한 상황에 난 얼굴을 찡그렸다.

“싫어요.”

“싫어요 씨, 같이 갑시다.”

수애는 말을 마치고는 내 팔을 덥석 잡고 나를 끌었다. 난 그냥 저항하지 않고 수애가 끄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그렇게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수애는 들어가자마자 마이크를 잡더니 혼자서 연달아 세 곡을 불렀다. 술만 안 마셨다 뿐이지 혼자 탬버린 흔들며 춤까지 추는 모습은 영락없이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어떻게 사이다만 마시고 저렇게 취하는 건지 신기했다.

“경주 씨도 하나 불러요.”

오랜만에 여자와 함께 온 노래방이 하필 수애람. 수지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자? 난 아직 술자리.’

수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제 자려고. 내 동생 수애 잘 챙겨줘.’

이 말의 뜻은 뭘까? 집까지 바래다주라는 걸까? 에이, 설마. 그냥 택시 태워서 보내주면 되지. 지난번 병원에서의 부탁도 생각나고 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걱정 마. 잘 챙겨줄게.’

그렇게 수애가 세 곡 부르면 내가 한 곡 부르고 하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노래방을 나와 집으로 가려는데 수애가 한 잔 더 하자고 했다.

“경주 씨, 벌써 들어가게요? 아직 초저녁이구만.”

술도 안 마시면서 저런 술꾼적인 발언을 하는 저 여자는 분명 정상이 아닐 것이다.

“싫어요.”

“어이, 싫어요 양반 한 잔 더 합시다.”

“지는 술도 안 마시면서.”

“같이 가요. 같이 가요.”

수애는 노래방에 날 끌고 갔듯이 또 내 팔을 잡고 끌기 시작했다. 정말 수지 동생만 아니면 진짜. 수지의 부탁도 있고 하니까 오늘만 참아야지. 번화가여서 12시가 넘어서도 문을 연 술집이 많았다. 늦게까지 할 만한 술집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자마자 수애는 내 잔에 술을 따라줬다. 그리곤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나는 사이다로 따라주세요.”

수애의 소주잔에 사이다를 따르자 탄산만 없으면 소주와 색이 똑같다며 혼잣말을 해댔다.

“건배. 첫 잔은 원샷!”

아무래도 내가 손해 보는 짓이다. 지는 사이다 마시면서 나보고 소주를 단번에 마시라니.

“싫어요.”

난 반만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수애는 사이다를 원샷 하고는 잔을 거꾸로 돌려 머리 위로 들고는 흔들었다. 많이 마셔본 행동이다.

“우씨, 그런 게 어딨어요? 나도 다 마셨는데.”

“당신은 사이다잖아.”

“억울하면 사이다 따라줄게요.”

말은 참 밉게 잘한다. 사이다 마실 거면 술집엔 왜 온담.

“교회 다녀도 다들 술 마시던데 당신도 몰래 마시죠?”

“잠시 방황할 때 좀 마셨죠.”

“보아하니 좀이 아닌데요?”

“들켰다. 퍼마셨어요.”

수애는 말을 하고는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했더니 혼자서 소주 한 병을 다 비워버렸다. 내 주량이 소주 한 병 반이지만 맥주를 많이 마신 후라 취기가 올라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수애에게 당하고 있다는 느낌뿐이었다. 수애는 대학교 때 얘기만 계속해댔고 나는 아무생각 없이 듣기만 했다. 지 대학시절 에피소드들이나 들려주려고 날 부른 사람처럼.

“나, 경주 씨에게 할 말 있어요.”

역시 수애는 고수였다. 내게 술 먹이고 지 할 말 하려고 함정을 파놓은 것이다.

“싫어요. 내일 정신 멀쩡할 때 합시다.”

“말은 내가 할 테니까 듣기만 하면 돼요. 대답 같은 거 안 해도 돼요.”

“싫다니깐. 뭐, 무슨 말을 하려고요? 칼질 가르쳐 달라고? 싫어요 싫어. 안 가르쳐줘. 왜냐고? 난 당신이 미우니까. 진짜 미워.”

“싫어요 씨, 아니 경주 씨, 그거 아니야. 듣기만 하면 된다고요.”

“뭔데요? 말해봐요.”

수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 눈을 보며 입을 열었다.

“나 미쳤나 봐요.”

“잘 아시네. 당신 미쳤어요. 정상이 아니에요.”

“나, 경주 씨가 멋있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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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님이 naha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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